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스카나의 마틸다 (문단 편집) === 첫번째 남편, '꼽추' 고드프리트 ===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 3세는 자신들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켜서 로렌 가문과 카노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로 했다. 1069년, 마틸다는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전처 도다[* 르텔 백작 마나세스 2세의 딸]와의 사이에서 낳은 '꼽추' 고드프리트와 결혼했다. 그 직후 고드프리트 3세가 사망하면서, 마틸다의 남편 고드프리트가 고드프리트 4세로서 공작에 올랐다. 이후 마틸다는 로렌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살았고, 토스카나 일대는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마틸다는 1070년에 임신해 1071년 1월 초에 딸을 낳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 베아트리체로 지었지만, 아기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인 1071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그 후 남편과 심한 불화를 겪은 마틸다는 1072년 1월 19일 로렌에서 탈출하여 만토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에게 달아난 뒤 안드레아스 수도원에 은거했다. 1072년 고드프리트 4세가 알프스를 넘어 토스카나의 여러 곳을 방문하며 마틸다의 남편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루카에 머물고 있던 마틸다가 만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재회에 실패했다. 1073년 여름 고드프리트가 로렌으로 돌아간 뒤, 마틸다는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친 교황 세력인 로렌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간의 서임권 분쟁이 발발했을 때, 마틸다는 교황을 지지한 반면 고드프리트 4세는 황제 편에 섰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해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맞서 싸웠으며, 웨스트 프리슬란트의 백작 디트리히 5세를 추방했다. 그런데 1076년 2월 27일, 고드프리트 4세는 블라르딩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마틸다에게 적대적인 독일측 연대기에서는 마틸다가 남편의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고드프리트 4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원칙대로라면 마틸다가 로렌 공국을 상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고드프리트는 암살되기 전에 조카 [[고드프루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영지를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로렌 공작에 세우고 나무르 백작 아달베르트 3세를 섭정으로 삼았다. 고드프루아는 108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